Soeun Sim

駐베트남 한국 공관원 송환을 위한 신호게임

2014. “駐베트남 한국 공관원 송환을 위한 신호게임, 1975-1980.” 국제정치논총 54(1): 34-68.

Dec 2, 2025
駐베트남 한국 공관원 송환을 위한 신호게임

한국 정부는 1975년 6월 사이공 함락 직후 한국 공관원 8명이 억류·수감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자, 즉각적으로 송환 의사를 베트남 측에 신호하면서도 직접교섭은 자제하는 신중한 전략을 택했다. 초기에 한국은 공관원 구금이 정치적 의도라기보다는 행정 혼선으로 인한 것이라 판단했고, 동시에 UNHCR·국제적십자 등이 잔류 외국인을 난민구호 차원에서 철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공관원도 ‘난민 송환’ 절차로 처리될 가능성을 기대했다. 여기에 프랑스가 철수 항공편 제공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 정부는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 신호우방국 외교 채널 가동이라는 다층적 신호 전략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UNHCR의 단기 체류, 국제기구의 정치적 사안 기피, 베트남 측의 “공관원은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정치적 프레임 천명 등으로 인해 국제기구 경로는 1976년 중반 이후 사실상 정보전달 및 생필품 전달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스웨덴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제3국 경로를 적극 활용했다. 스웨덴은 1975년부터 PRG·월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장 우호적 채널로 간주되었고, 실제로 스웨덴 외무성 리프란드 차관보가 북베트남 마이반보 구주국장에게 반복적으로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외교적 통로가 형성되었다. 이후 윤하정 대사의 부임(1978)으로 스웨덴-베트남 간 고위급 연결망(스웨덴 외무성–오베르그 대사–응구엔코탁 부상)이 강화되자 스웨덴 채널은 사실상 가장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간접교섭 수단으로 발전했다. 반면 프랑스는 초기에 철수 항공편 제공 등 전반적 협력을 표명했으나, 베트남·북한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실제 석방 교섭에는 소극적이었고, 1977년에 이르러서야 제한적인 수준에서 조기석방 문제를 베트남에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마지막으로 한국 정부는 1977~1978년 사이 북한·베트남과의 비밀 3자 협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프랑스와 스웨덴 경로만으로는 수감자 신분 문제(베트남은 ‘중대 범죄자·정보요원’ 주장)를 해결할 수 없었고, 베트남이 북한 의견을 중시한다는 현실 때문에 선택된 경로였다. 그러나 협상은 ‘전쟁포로 vs 부당수감 외교관’이라는 신분 규정의 충돌과, 교환비율(북한의 1:70 요구 ↔ 한국의 1:3)·교환대상자 범위(북한은 남한 출신 간첩 중심 요구) 등에서 난항을 겪었다. 1978년 말에야 1:7 비율의 잠정합의가 도출되었으나, 1978년 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베트남-북한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베트남은 북한을 배제하고 한국과의 직접 비선 교섭을 선호하게 되었다. 결국 3자회담은 1979년 5월 한국의 중단 요구 이후 더는 열리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이후 비선 채널(아이젠버그 라인) 중심으로 석방 전략을 전환하게 된다.

신호이론은 협상 상황에서 흔히 발생하는 정보 비대칭을 전제로 한다. 협상 상대방의 의도나 진정성을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송신자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수신자는 그 정보가 사실인지 “빈말(cheap talk)”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빈말”은 전달해도 송신자에게 실질적 비용이 들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본질적으로 낮다. 반면에 ‘신뢰할 수 있는 신호’ 는 송신자가 일부러 비용을 지불하거나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증명하는 유형의 정보다. 수신자는 바로 이 비용 구조를 근거로 정보의 신뢰성을 판단한다.

이 때문에 협상의 핵심은 송신자가 의도적으로 부담하는 ‘전략적 비용’이다. 송신자는 자신의 결의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비용이 드는 선택을 해야 하며, 이러한 비용 구조가 신호의 신뢰성을 높인다. 핵심은 정보의 “진실성 그 자체”가 아니라, 수신자가 그 신호를 얼마나 믿을 수 있다고 느끼는가이다. 예를 들어 노동시장에서의 교육비용, 무급 인턴 경험, 짝짓기에서 공작의 화려한 깃털 같은 ‘자해적 비용’은 모두 신호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비용의 예로 제시된다.

국제정치에서도 신호이론은 1990년대 이후 널리 활용되었다. 무역국가 간 분쟁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 간 갈등이 협상으로 해결되기 쉬운 이유가 바로 신호 구조로 설명된다. 예컨대 무역분쟁을 일으키는 국가는 스스로 큰 손해를 감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행위는 상대에게 “우리는 정말 결의가 있다”는 신뢰성 있는 신호가 된다. 이러한 신호전달이 성공하면, 더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군사적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국제정치에서 신호이론은 협상이 어떻게 전쟁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특정 유형의 갈등은 군사 충돌로 비화되지 않는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적 분석 틀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의 한국은 민주주의 지표가 ‘0점’에 가까운 비민주적 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공관원 억류 사건을 국내에 공개하더라도 지도자가 정치적 책임을 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즉, 한국 정부가 언론을 활용해 대외적 ‘압박 신호’를 보내더라도 국내 청중비용이 존재하지 않아 신호의 신뢰성이 매우 낮았다. 더구나 베트남 역시 비민주주의 체제여서 한국의 국내 정치적 비용 구조를 이해하거나 평가할 가능성도 낮았다. 결과적으로 언론공개는 베트남에 ‘빈말’로 인식될 뿐 효과가 없고, 오히려 정권의 정당성에 손해만 초래한다고 판단한 한국 정부는 언론을 통해 압박하기보다 사건 자체를 철저히 숨기는 전략을 선택했다.

한국 정부는 공관원 석방 의지를 신뢰성 있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매몰비용(sunk cost)을 감수했다.

첫 단계에서는 베트남 전쟁 이후 한국 교민의 베트남인 가족까지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려 출국 비용 전액을 부담했으며, 이는 한국 정부가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 실제 비용을 치르는 방식으로 결의를 신호하려는 전략적 행위였다. 이어 한국은 UNHCR·WHO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베트남 구호 활동에 명목상 수준이나마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교민·공관원 철수를 위한 ‘인도적 제스처’를 쌓아 갔다.

1976~1977년 사이에는 WHO 지원이 확대되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이 베트남 보건 복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이는 베트남에게 한국 정부의 태도가 단순한 외교적 요구가 아니라 실제 자원을 투입하는 ‘비용 있는 신호’임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비용 증가에 대응해 베트남도 점차 더 진실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대한 범죄 조사 중’과 같은 사실과 다른 신호를 보냈지만, 1977년 이후에는 북한의 반대로 석방이 어렵다는 등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고, 프랑스의 중재 요청에도 동일한 입장을 반복했다.

1978년에 이르러 한국은 대규모 몸값 지불 의사까지 밝히며 비용을 극대화했지만, 베트남은 명분 부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남북한 간 간첩-공관원 맞교환을 조정하는 중재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시적으로 보면, 한국의 비용 부담이 커질수록 베트남의 신호도 더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즉, 지속적인 매몰비용 투입은 한국의 결의를 강화하는 신호였고, 이는 베트남이 점차 협상 과정에서 더 투명한 입장을 드러내며 교환 조건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만든 핵심 요인이었다.

신호이론은 한국 공관원 석방 협상에서 나타난 두 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첫째, 유신체제 하의 한국 정부가 사건을 국내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게 해준다. 비민주적 체제에서는 지도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국내 정치적 처벌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언론을 통한 공개 압박이 ‘신뢰할 만한 신호’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1976년 후반 대중매체를 통한 압박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한국 정부는 국내 청중비용이 존재하지 않아 신호의 신뢰성이 낮다고 판단해 비밀교섭을 지속했다. 이는 협상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주의 정권보다 신호 신뢰성 측면에서 불리하다는 기존 이론을 재확인하는 사례다.

둘째, 신호이론은 한국과 베트남 간 정보 전달에서 매몰비용(sunk cost)이 신호 신뢰성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정부가 난민구호 등 국제기구 지원을 소규모로 제공하던 시기에는 베트남이 허위이거나 무성의한 정보만을 회신했다. 그러나 WHO 지원 확대, 국제회의 발언, 고위급 접촉 등 한국의 비용 감수 규모가 커지자 베트남도 점차 더 진실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북한 간 간첩–공관원 맞교환을 중재할 정도로 협상에 적극 개입했다. 이 과정은 비용을 실제로 지불하는 행위가 신호의 신뢰성을 강화한다는 신호이론의 핵심 논지를 사례로 보여준다.

또한 이 사례는 민주주의 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이 신뢰성 있는 신호를 만드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약속을 어길 경우 발생하는 국내 청중비용(사후비용, ex post cost) 덕분에 신뢰성 있는 신호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는 국내 청중비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신호를 보내기 전 단계에서 스스로 비용을 지불하는 사전비용(ex ante cost) 전략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한 정권의 강경 발언은 국내적 처벌 기제가 없으므로 본질적으로 ‘빈말’에 가깝고, 반대로 한국 정부는 국내 청중비용을 활용해 더 신뢰성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결국 신호이론은 남북한 위기나 협상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는 이론적 틀임을 확인시켜 준다.

  • 독립변수(X): 한국정부의 신호 비용(costliness)
  • 종속변수(Y): 베트남정부의 협상 반응 변화 (진실성 증가·석방 협조)
  • 분석단위 =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보낸 개별 ‘신호 행동’ 사건.

스위스 총회에 갔던 이유는 한국에서 WHO를 개최하겠다는 시그널을 준 것임. 이유는 월남문제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음. 이들과 접촉했던 자료가 남아있음. 베트남 수석대표의 의료협력을 제의하였음. 이에 대해 아국 대표에게 과거가 무슨의미가 있는지,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고 한 뒤 한국은 미국과 친하니 미국에게 베트남 이야기를 요청함

스웨덴은 중립국이나 미국에 꽤나 적대적이었던 입장. 유일하게 서방국가 중에서는 북한과 연결고리가 있었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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