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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박동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한국국제정치학회 50집 4호

Nov 17, 2025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의 자발성과 자유가 사회 발전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며 자유주의를 정교하게 정립한 사상가이지만, 동시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동인도회사에서 35년간 근무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정하는 방식이 최선”이라고 말하면서도,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러시아·아일랜드 등 비산업화 지역의 주민들은 지적·도덕적 능력과 정치적 성숙도가 부족해 아직 자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민들은 현재 조건상 “온정적 전제·계몽적 독재” 아래에서 지도받아야 하며, 자치는 일정한 덕성과 능력이 배양된 뒤에야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입장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다원론과, 미개·반야만·개명의 발전 단계론에 기반한 계몽주의적 제국주의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듯한 이론적 긴장을 낳는다.
그러나 이 글은 밀을 단순한 인종주의자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밀의 제국주의는 인종적 열등함을 가정한 인종주의가 아니라, 벤담·생시몽·콩트·다윈의 영향이 섞인 19세기식 계몽주의적 역사 단계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더불어 밀의 제국주의는 절대적 원칙이 아니라 당대의 조건에서 불가피하다고 본 ‘시의성(expediency)’의 판단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은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19–21세기 다양한 형태의 제국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다 공정하고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19세기 영국 지식인들 다수는 인도와 비유럽 지역을 ‘반야만적’이라고 규정하며 심각한 오만을 드러냈다. 제임스 밀은 인도에 가본 적도, 힌두어도 모른 채 인도 문명 전체를 “거짓과 과장”으로 몰아갔고, 제임스 스티븐과 매콜리 역시 영국 지배를 ‘계몽’으로 포장하며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당연시했다. 이러한 태도는 식민지 폭력(예: 1919년 암리차르 학살)까지 “영국의 도덕적 위신”으로 미화될 만큼 제국주의적 자기정당화에 찬물이 된 사례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제국주의 비판 텍스트 대부분조차 원주민이 아니라 식민지 정착 유럽인을 중심에 놓고 논의한 점을 보면, 당시 유럽 지적 환경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 드러난다.

밀은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리주의자였던 그는 자유가 좋은 이유를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면서 지성과 인격이 성장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자유는 좋은 결과가 자동으로 나오는 마법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키워주는 과정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유가 잘 작동하려면 어떤 사회적·문화적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 조건이 부족한 비유럽 사회를 “아직 성숙하지 못한 단계”라고 판단했고, 그들에게는 당장은 강한 지도나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믿음이 바로 밀의 제국주의적 발언들로 이어졌다. 『자유론』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의 선택에 간섭하지 말라”는 원칙을 강조했지만, 실제 정치 문제에서는 그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예외를 뒀다.

슘페터는 존 스튜어트 밀을 “표면적이고 모순된 사상가”라고 혹평하며, 그가 이론의 깊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복잡한 문제를 회피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로빈스는 이것이 오히려 슘페터가 영국적 사고방식 (즉, 추상적 이론보다 실제 적용 가능성과 현실 판단을 중시하는 사유)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보았다. 이 장은 밀의 사유가 단순히 이론적 일관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맥락에서의 실질적 효과와 판단을 중시했다는 점을 부각한다.

밀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흄의 명제, “속성의 정확한 정도는 그 속성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에 기반하여, 도덕적 원칙 역시 실제 적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즉, 원칙이 먼저 존재하고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의 의미는 그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발언의 자유’ 사례처럼,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허용과 금지의 경계가 실제로 결정된다는 점은 밀의 ‘시의성(expediency)’ 판단이 단순 편의주의가 아니라 인간 삶의 불가피한 현실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고르 문학을 벵골문학인가 영문학인가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본질을 놓치듯, 정체성·원칙·사상 등을 이론적으로만 분류하려는 태도는 실제 당사자가 직면한 문제와 삶의 경험을 외면한다. 타고르에게 중요한 것은 ‘진정한 벵골성’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자신의 시적 감흥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유주의자인지 제국주의자인지의 사후적 평가가 아니라 실제 정책이 인도인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였다. 이 장의 결론은, 원칙·정체성·사상의 분류보다 실존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행위와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 장에서 저자는 밀의 자유주의가 절대적·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적용 가능한 사회 조건’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밀에게 자유는 공론이 작동할 수 있을 만큼 사회 구성원이 지성과 덕성의 최소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이러한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된 사회 (그가 말하는 ‘야만적 상태’) 에는 오히려 선의의 전제 통치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즉, 자유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산물이며, 진정한 자유의 운용은 그 사회가 자발적 판단·책임·토론의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 밀의 입장이다.

밀의 이러한 관점은 제국주의 정당화 논리로 쉽게 이어졌다. 그는 자유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비유럽 사회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제국의 역할을 “폭력적 지배”가 아닌 계몽과 향상으로 이끄는 과도기적 조치로 이해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의 강압적 개혁론과 달리, 존 밀은 현지 권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설득과 점진적 개선을 중시하는 ‘공론의 제국’ 노선을 따랐다. 결국 이 장은 밀의 자유주의가 제국주의와 충돌하는 모순된 철학이 아니라, 그의 공론 중심적 자유관과 시의성 판단에서 발생한 복합적 결과임을 보여준다.

밀은 인도인들의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영국이나 아일랜드보다 낮게 평가하며, 아직 ‘개명 이전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폭력적 정복이나 직접 통치에는 반대했지만, 계몽된 자유주의자 영국인들이 인도를 지도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프랑스·포르투갈의 “문명화 사명”이나 키플링의 “백인의 부담”과 유사한 생각을 공유했다.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의 보편적 원칙과 식민지 현실 사이에서 원칙(자유·자발성·개인성)보다 “현실적 조건”을 우선한 그의 시의적·실용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웨이크필드 식민 모델처럼 ‘효율성’과 ‘생산성’을 강조하며 원주민 토지권을 경시한 점도 공리주의적 사고의 연장선이었다.

파레크 등은 밀의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비유럽사회에 대한 타자화·문화적 우월성·편협한 다양성 이해를 내포한다고 비판하지만, 저자는 이 비판이 부분적으로는 과도하다고 본다. 밀은 자유주의를 유럽 고유의 산물로 보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기독교 등 다양한 전통을 선택적으로 흡수했으며, 원칙을 절대화하기보다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중시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유지했다. 또한 그는 비유럽의 종교적 관행이나 전통적 삶을 멸시했다기보다, 대다수 사람들이 빈곤·착취·무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며(?), 이는 서구중심주의가 아니라 공리주의적 인간개선론의 표현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를 단순히 자유주의의 본질로 보는 것은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않으며, 과거의 책임 공방보다 각 사회가 현재 처한 조건 속에서 실존적·시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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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간접통치 지지가 정말 ‘공론의 제국’을 의미했는지, 아니면 제국의 효율적 지배 방식에 대한 차가운 계산이었는지 재평가가 필요하다.

밀은 비유럽 사회를 ‘개명 이전 단계’로 규정하고 자유를 누릴 자격 또한 일정한 지적·도덕적 역량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는 단순한 식민지 지배의 논리로 끝나지 않고, 이후 ‘누가 더 합리적·문명적이며, 누가 아직 미성숙한가’를 서구가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유럽식 제도·지식·가치가 보편적 표준이 되고, 비유럽 사회는 항상 ‘뒤처진 단계’에 위치시키는 사고방식, 즉 지식의 식민성(cognitive colonialism), 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개발 담론, 민주주의 평가, 제도개혁 논의 속에 남아 있는 “성숙/미성숙”, “전통/근대”, “역량 부족” 같은 표현들도 이러한 밀적 사고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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